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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의원이 1981년 미국에서 보낸 한 해를 기록한 일기. 당시 스물아홉 살이던 지은이의 혼돈스럽고도 치열한 청춘의 고백을 담았다. 군대에서 쓴 '병정일기'가 문제가 되어 결혼식도 제대로 못한 채 야반도주하듯 떠난 미국에서의 이민.신혼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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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뜨면 없어라>

그때가 벌써 언제였을까.
15년전... 그녀와 내가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했을 때, 그녀는 고교 3학년생이었고, 나는 막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한 엉터리 대학생이었다.
내가 대학신문에 쓴 <병정일기>라는 짧은 글을 그녀가 우연히 보고 호감을 가진 것이 발단이었다. 외동딸의 성화에 못 이긴 그녀의 부모가 나를 찾아서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녀가 교복을 벗고 바야흐로 대학생이 된 봄날, 신촌 근처의 찻집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영미계통의 시를 열심히 공부해서 실력있는 대학교수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그리곤 내게 무엇이 되고 싶으냐고 물었다. 그 시절의 나는 정말이지 대답할 거리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단 말이에요?하고 그녀가 재차 물었다.
『내 소원은 그냥 놀고 먹는 거야. 막 어질러놓고 아무렇게나 사는 거야.』
나는 매우 정직하게 말했다. 그녀는 그때 쿡쿡 웃었는데, 몇 년이 지난 어느 날엔가 그 일을 떠올리면서 내게 말했다.
『사실은 그때 너무 놀랐어요. 세상에 놀고 먹는 게 소원인 사람이 있다니...』
<병정일기>는 내게 꽃다운 그녀를 만나게 해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무서운 사람들과도 만나야 하게 만들었다. 군의 기밀을 누설하고 국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는 혐의로, 나는 모 기관에 끌려가서 심하게 야단을 맞았고, 그 일은 내가 그녀와 함께 해외로 나가도록 만든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녀와 나는 부부가 되어서 미국으로 날아갔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찾아 떠난 것이 아니라, 유황의 불길을 겁내며 달아난 셈이기도 했다.

미국에서의 첫 해, 나는 보통 하루에 열여섯 시간씩 막일을 하면서 학교를 기웃거리기도 했고, 그녀도 옷가게 등에서 일하면서 울며불면서 이를 악다물고 학교에 다녔다.
미주 《한국일보》 기자로 일하면서부터, 나는 내 속에 잠재돼 있던 어떤 속된 야망을 만나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놀고 먹는 게 꿈이었는데, 나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하고 사는 삶들을 비웃고 싶었는데, 절대로 그게 아니었다. 나는 그야말로 억척으로 일했다. 남에게 지고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충성스럽게 일하고 뛰며, 기사며 칼럼을 써 재꼈다. 칭송을 구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유치한 허영이 그즈음의 나를 온통 지배했는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그녀에게 져서는 안 된다는 조바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미국에서의 첫 두 해 동안에 이룬 일은, 우리의 아들을 낳은 일과 영문학 석사를 딴 일이었다. 이어 법과 대학원에서 박사를 마치면서 변호사 자격시험을 통과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미국에 온 지 다섯 해 만이었다.
나는 그때 《중앙일보》의 샌프란시스코 지사장이 돼 있었다. 옆 자리의 동료들이 눈치를 주는 것 따위는 아랑곳 없이, 아주 게걸스럽게 일한 결과였다.

결혼생활 5년 동안, 우리가 함께 지낸 시간은 그 절반쯤이었을 것이다. 그 절반의 절반 이상의 밤을, 나나 그녀 가운데 하나 혹은 둘 다 밤을 새워 일하거나 공부해야 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살았다. 모든 기쁨과 쾌락을 일단 유보해 두고, 그것들은 나중에 더 크게 왕창 한꺼번에 누리기로 하고, 우리는 주말여행이나 영화구경이나 댄스파티나 쇼핑이나 피크닉을 극도로 절제했다. 그즈음의 그녀가 간혹 내게 말했었다.
『당신은 마치 행복해질까 봐 겁내는 사람 같아요.』
그녀는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다섯 살 때였나봐요. 어느 날 동네에서 놀고 있는데 피아노를 실은 트럭이 와서 우리집 앞에 서는 거예요. 난 지금도 그떄의 흥분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가 바로 그 시절을 놓지고 몇 년 뒤에 피아노 백 대를 사줬다고 해도 나한테 내게 그런 감격을 느끼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예요.』
서울의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내게 이런 편지를 보내시곤 했다.
「한길아, 어떤 때의 시련은 큰 그릇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대개의 경우 시련이란 보통의 그릇을 찌그러뜨려 놓기가 일쑤란다.」

애니웨이, 미국생활 5년 만에 그녀는 변호사가 되었고 나는 신문사의 지사장이 되었다. 현재의 교포사회에서는 젊은 부부의 성공사례로 일컫어지기도 했다. 방 하나짜리 셋집에서 벗어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3층짜리 새 집을 지어 이사한 한 달 뒤에, 그녀와 나는 결혼생활의 실패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바꾸어 말하자면, 이혼에 성공했다.
그때그때의 작은 기쁨과 값싼 행복을 무시해버린 대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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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길 - 1952년 함북 경성에서 태어나 건국대 정외과를 졸업했다. 미주 「한국일보」기자, 「중앙일보」미주 지사장, 방송위원회 대변인, 기획국장, 사무총장 등을 거쳤다. 「문학사상」소설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다수의 장단편 소설과 칼럼.수필.일기집 등을 집필했으며, 「동아일보」에 '김한길의 세상읽기', 「국민일보」에 '김한길 칼럼' 등을 연재했다.

정치인으로서는 국민회의 15대 총선 선대위 대변인, 15대 국회의원, 15대 국회 교육위, 재경위, 문광위 위원, 국민회의 교육특위 위원장, 국민회의 대통령선거 방송대책팀장,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공보팀장, 대통령 정책기획수석비서관, 16대 총선 선대위 수석부본부장, 총선기획단장, 대변인, 홍보위원장, 문화관광부 장관 등을 역임했다. 2006년 현재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 중이다.

2007/12/10 03:24 2007/12/10 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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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gital Nomad 이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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