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 에세이『자전거 여행』서문
벗들아, 과학과 현실의 이름을 들먹여가며 이 가엾은 수사학을 조롱하지 말아다오. 나는 마침내 내 자신의 생명만으로 자족할 수 없고, 생명과 더불어 아늑하지 못하다. 그리고 이 부자유만이 나의 과학이고 현실이다. 나는 나의 부자유로써 나의 생명을 증거할 것이다.
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만경강 저녁 갯벌과 거기에 내려앉는 도요새들의 이야기를 쓰던 새벽 여관방에서 나는 한 자루의 연필과 더불어, 말하여질 수 없는 것들의 절벽 앞에서 몸을 떨었다. 어두워지는 갯벌 너머에서 생명은 풍문이거나 환영이었고 나는 그 어두운 갯벌에 교두보를 박을 수 없었다. 나는 아무 것도 만질 수 없었다. 아무 것에도 닿을 수 없는 내 몸이 갯벌의 이쪽에 주저앉아 있었다.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까지 전국의 산천으로 끌고 다닌 내 자전거의 이름은 풍륜(風輪)이다. 가을의 마지막 빛 속에서 풍륜은 태백산맥을 넘었다. 눈 덮인 소백·노령·차령산맥들과 수많은 고개를 넘어서 풍륜은 봄의 남쪽 해안선에 당도하였다. 거기에 원색의 꽃들이 피어 있었다. 이제 풍륜은 늙고 병든 말처럼 다 망가졌다. 2000년 7월에 풍륜을 퇴역시키고 새 자전거를 장만하였다. 이 책을 팔아서 자전거값 월부를 갚으려 한다. 사람들아 책 좀 사가라.
갈 수 없는 모든 길 앞에서 새 바퀴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아, 아무 것도 만질 수 없다 하더라도 목숨은 기어코 감미로운 것이다, 라고 나는 써야 하는가. 사랑이여, 이 문장은 그대가 써다오.
―김훈 에세이『자전거 여행』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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